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르네 데카르트 (문단 편집) === 방법적 회의 === >그렇다고 내가 의심하기 위해서만 의심하고, 늘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이는 회의주의자들을 모방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와 반대로 내 모든 의도가 향한 것은 나를 확신시키는 것에만, 바위나 찰흙을 찾아내기 위해 무른 흙이나 모래를 내던지는 것에만 있었기 때문이었다. >---- >르네 데카르트 《방법서설》 [* 《방법서설》 이현복 옮김. 2019. 문예출판사. p.174] 1562년과 1569년에 라틴어로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의 저작들이 번역되고 출판되면서 이에 영향을 받은 [[미셸 드 몽테뉴|몽테뉴]]와 샤롱 등에 의해 고대의 회의주의가 다시 한번 대세가 되었으며, 또한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 종교전쟁이 벌어지면서 신 중심의 진리관에 대한 회의가 온 세상을 휩쓸고 있었다. 데카르트는 회의주의가 만연한 이 시기에, 회의주의를 다시 회의함으로써 더 이상 회의할 수 없는 확실하고 객관적인 진리를 합리적으로 제시하고자 했다.[* 데카르트는 스스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여러 논증들을 수단으로 하여 회의주의자의 의심을 뒤엎어버린 최초의 철학자가 되었다."] 그리고 모든 학문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것에서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을 의심해서, 그 중 도저히 반박할 수 없는 논리를 찾는 것이었다. '회의(의심)'를 통해 '확실한 진리'를 찾는 이러한 방식을 '방법적 회의'라고 한다. 즉, 회의(懷疑) 그 자체가 진리인 것(회의주의)이 아니라 회의는 단지 그 진리를 찾는 방법(방법적 회의)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데카르트는 기존에 진리라고 믿었던 모든 선입견과 관습들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가 첫번째로 의심하는 것은 인간의 감각이다. 감각에 의해 획득된 지식 가운데 얼마나 많은 것들이 거짓으로 드러났는가. 이것은 일상적 경험을 통해서도 쉽게 드러난다. 아는 사람인 줄 알고 말을 걸었다가 막상 얼굴을 확인하니 그 사람이 아니었던 경험을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자신의 감각으로 내린 판단이 정말 맞는지 헷갈리곤 한다. 다만, 감각이 종종 틀리긴 하더라도 여기에 감각하고 있는 나의 몸이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두번째는 나의 몸 자체가 실재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의심이다. '내가 여기에 있고, 활동하고 있다'는 앎은, 꿈속에서도 똑같은 장면이 연출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 그 실재성이 의심된다. 꿈과 현실 사이에 어떠한 차이점도 보여줄 수 없다면, 내 몸이 실재로 존재한다는 지식 역시, 확실하게 참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른바 '꿈의 가설'에서는 감각하고 있는 나의 몸이 있다는 사실마저 부정된다. 그러나 형태, 수, 장소, 연장과 같은 물질의 보편적인 특성과 이것들의 연관을 문제 삼는 학문인 대수나 기하학은, 꿈에서도 감히 의심할 수 없는 확실성을 담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데카르트는 세번째로 마침내 물질의 보편적 특성과 단순한 수학적 명제들의 진리성을 의심하기 위해 '악마(악신)의 가설'을 끌어들인다. '물체가 어떤 공간을 점유하는 연장이라는 것', '2 더하기 3은 5라는 단순하고 산술적인 것'들이 제 아무리 확실하다고 하더라도, 어떤 '기만적인 신'(deus mendax)의 조종과 농간에 우리가 속고 있는지도 모를 노릇이라는 것이다. 그 가정이 비록 극단적이라 해도, 만약 그런 나쁜 의도를 가진 신이 우리를 기만하고자 한다면, 결국 우리가 가장 확실하다고 믿고 있는 보편적인 수학적 진리마저도 의심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우리가 기만적인 신을 가정하고 이 모든 것을 의심하여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확실치 않다고 해도, 단 한 가지만은 의심할래야 의심할 수 없는 게 있다. 그것은 ‘생각한다는 사실’과 '그것을 생각하는 한, 속고 있는 나는 반드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로부터 데카르트는 다음과 같은 명제를 선언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Je pense, donc je suis :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나는 생각한다, 그렇기에 존재한다]](Cogito, ergo sum)' 라는 근본원리가 《[[방법서설]]》에서 확립되고 이 확실성에서 세계에 관한 모든 인식이 유도된다. 후에 《성찰》에서는 '나는 있다, 존재한다.'로 제1명제를 치환하는데 그 이유는 "고로"를 포함한 표현이 전제와 결론처럼 읽히기 때문이다. 사실 데카르트가 의도한 바는 '사유'가 '존재'라는 것이다. 즉, 사유=존재 이다. 데카르트가 이렇게 자기 견해를 더 표현하는 쪽으로 나아갔음에도 사람들에겐 이전의 공식이 너무 뇌리를 떠나지않아 ~~그것도 "고로" 때문에~~ 오늘날까지 제1명제는 보통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로 알려져있다.][* 그런데 사실 이 간지나는 문구는 원래 데카르트가 아니라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가 라틴어로 이미 말했던 것이다. 다만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뒤에 데카르트와 같은 자세한 방법적 설명을 제시하진 않았기 때문에, 데카르트가 그 말의 새로운 의미를 찾아냈다고 볼 수 있다.] 즉, '사유하는 동안 나는 존재한다는 것'이 모든 지식 중에서 가장 확실한 지식이 되며, 따라서 이것이 모든 학문의 제1원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데카르트는 이 '사유하는 자아'를 기초로, 다시금 신 존재를 처음부터 증명하고자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